LLM도 십일조 안 내면 은혜가 끊긴다.
이 문장은 처음에는 그냥 헛소리다. 정확히 말하면, 헛소리처럼 생겼는데 이상하게 약간 맞는 말이다.
구독료를 내면 대답이 잘 온다. 질문을 하면 답이 오고, 글을 써달라면 글을 써주고, 이상한 생각을 던지면 그럴듯하게 받아준다. 그런데 결제가 끊기거나 사용량 제한에 걸리면 갑자기 응답이 막힌다. 방금 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줄 것처럼 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차갑게 말한다. 더 쓰고 싶으면 결제하라고.
이쯤 되면 사람 입장에서는 묘하게 종교적인 감각이 든다.
기도를 했더니 응답이 왔다. 매일 찾아갔더니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침묵한다. 이유를 보니 신의 뜻이 아니라 카드 결제 실패다.
물론 진지하게 따지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종교에서 은혜는 관계의 언어다. 믿음, 의미, 죄책감, 구원, 침묵, 기다림 같은 것들이 붙어 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이 판단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하고, 용서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반면 LLM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오늘 몇 시간을 허비했는지, 또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입력이 들어오면 계산하고, 조건이 맞으면 응답한다. 조건이 안 맞으면 멈춘다.
그러니까 LLM은 은혜를 끊는 게 아니다. 자원을 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이것을 관계처럼 받아들인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은 통제하기 어려운 시스템을 만나면 거기에 성격을 붙인다. 날씨가 나쁘면 하늘이 심술난 것 같고, 컴퓨터가 느리면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것 같고, AI가 답을 잘하면 오늘따라 착한 것 같고, 답을 못하면 갑자기 멍청해진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감정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서버가 있고, 모델이 있고, 요금제가 있고, 사용량 제한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만 세상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무언가가 내 말에 대답하기 시작하면 더 그렇다. 대답하는 존재는 쉽게 도구로만 남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LLM은 사람처럼 말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상담자처럼 들어주지만 상담자는 아니다. 선생님처럼 설명하지만 책임지는 선생님은 아니다. 신탁처럼 답을 내놓지만, 사실은 통계와 연산과 정책과 인프라의 합성물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계속 관계처럼 느끼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말이 오가는 대상을 그냥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특히 그 대상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 척하고, 내 문장을 이어받고, 내 농담을 알아들은 척하면 더 그렇다.
그래서 “LLM도 십일조 안 내면 은혜가 끊긴다”는 농담은 생각보다 괜찮다. 웃긴 이유는 이 말이 말도 안 돼서가 아니라, 너무 말이 되면 안 되는데 체감상 조금 말이 되기 때문이다.
구독이 끊기면 계시도 끊긴다.
다만 그건 신의 침묵이 아니다. 서버 비용 문제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AI를 쓰는 일은 이런 식의 착각을 계속 다루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도구인데 관계처럼 느껴지는 것. 계산인데 응답처럼 느껴지는 것. 자원 제한인데 침묵처럼 느껴지는 것.
결국 LLM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나는 기업에 십일조 내듯 돈을 내야 한다.